영적 일들

[스크랩] 용서하지 않을 때 입는 피해/영적인 싸움을 하고 있는가?/죄성(罪性)이 자신을 지배하지 않도록 조심하라!

hepsiba 2014. 7. 11. 01:19

용서하지 않을 때 입는 피해


"하나님, 그의 마누라가 과부가 되게 해주시고, 그 아이들은 고아가 되게 해주시며, 빌어먹게 해주시옵소서.

그 집안의 씨를 말려주십시오."

성경에 이런 기도가 있습니다.

시편 109편에 나오는 다윗의 기도가 이런 기도입니다.

다윗은 그 마음에 품은 것을 그대로 쏟아내고 있습니다.

그의 장인인 사울왕은 그의 딸을 아내로 줬다가 다시 빼앗아서 다른 남자에게 주었습니다.

이때, 어떤 기도가 나올 것같습니까?

이럴 때 어떻게 기도하시겠느냐고 묻자, 어느 장로님은 "주여, 모가지를 비틀어주옵소서"라고 기도하겠다고 말

합니다.

  


다윗은 마음에 있던 원통함을 하나님 앞에 토해냈습니다.

그래서 충동적으로 행동하지 않고 원수가 코앞에 있을 때도 다윗은 그를 죽이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마음에 원통함을 품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그 마음에 있는 것을 그대로 솔직하게 주님께 토해냈습니다.

 하나님 앞에 솔직하게 마음을 토하고 주님을 피난처로 삼은 다윗을 향해 하나님은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칭찬하셨습니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 포장하고 나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앞에 폼 잡고 나오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 있는 그대로의 마음을 솔직히 토로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기도를 기뻐하십니다.

  

[용서하지 않는 자가 당하는 영적 피해]

 

첫째, 용서하지 않으면 마음이 더러워지고 죄를 품게 됩니다.

문제는 하나님께서 죄를 품고 있는 자의 기도를 듣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둘째, 용서하지 않으면 사탄이 틈을 탑니다.

사탄이 무서워하는 기도 중에 하나가 바로 용서하는 기도입니다.

용서기도를 하면 틈이 없어지고 그 사람에 대한 지배력이 없어지기 때문에 용서기도를 못하도록 훼방 합니다.

  

셋째, 용서하지 않으면 미워하는 사람을 닮아갑니다.

우리는 용서하지 않는 사람을 닮아갑니다.

그 사람을 용서하지 않고 거부하면서도 그 사람을 마음에 품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자꾸만 생각하다가 그 사람을 닮아갑니다.

  

넷째, 용서하지 않으면 그런 이성과 결혼하게 됩니다.

상대를 용서하지 않는 사람은 자기도 모르게 그 사람을 마음에 품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 사람을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그런 사람에게 익숙해집니다.

그러다보니 이런 사람을 만나면 친근감을 느낍니다. 친근하고 편안한 느낌을 받다보니

만나면서 결혼까지 하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결혼한 다음에야 깜짝 놀라고 후회하는 것입니다.

 

다섯째, 용서하지 않으면 주님과 멀어집니다.

여섯째, 용서하지 않으면 주님을 닮아갈 수 없읍니다.

일곱째, 용서하지 않으면 관계가 회복되지 않습니다.

여덟째, 용서하지 않으면 몸이 쇠약해집니다.

아홉째, 용서하지 않으면 외롭게 삽니다.

열번째, 용서하지 않으면 과거에 묶입니다.

열한째, 용서하지 않으면 상처가 치유되지 않습니다.

열두째, 용서하지 않으면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용서란 무엇인가?

첫째, 용서는 결단입니다.

용서할 마음이 없지만 용서의 결단을 내리고 고백하는 것, 그것은 가식도 위선도 아닌 순종입니다.

하나님은 순종하는 자를 변화시켜주시고 순종하는 자에게 복을 주십니다.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용서는 결단입니다.

  

둘째, 용서는 과정입니다.

용서는 한번 했다고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용서했는데 그 사람이 또 밉다"라고 말씀하시는 분이 있습니다.

한번 용서했다고 그 마음이 다 풀어지지 않습니다.

용서는 과정입니다. 계속해야 합니다.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죽을 때까지 계속 용서해야 합니다.

  

셋째, 용서는 은혜입니다.

용서는 하나님이 당신을 용서하신 은혜를 기억하면서 하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죄사함에 관한 깨달음과 감사가 없거나 있더라도 곧 잊어버리기 때문에 용서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용서할 때 복을 받습니다.

  

용서의 과정에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어떤 분은 용서했다고 하고 즉시 그 사람과 화해하거나 그 사람을 신뢰하며 함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간혹 상대가 전혀 화해를 원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화해는 상호간에 이루어집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와 화해하기 원하시어 예수님을 화목제물로 주셨지만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결국 하나님과 화목케 되지 못합니다.

상대방이 화목케 되길 거부한다면 그의 그러한 선택 또한 용납해야 합니다.

물론 화목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만 우리가 그들을 대신하여 결정 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용서했다고 그 사람을 즉시 신뢰하거나 함께 있어야 한다는 것은 오히려 어리석고 위험한 생각일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어느 자매가 사촌오빠에게 강간을 당했는데 그 뒤 그를 용서했고 진정한 용서의 증거로 그 오빠와

단둘이 두려움 없이 방에 있을 수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잘못이라는 말입니다.

가산을 탕진해가며 도박하는 사람을 용서했다고 해서 그 사람이 돈을 요구할 경우 다시 돈을 줘야 합니까?

그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또 공금을 횡령했던 직원을 용서했다고 그 즉시 그에게 다시 재정을 맡긴다면 그것도 지혜롭지 못한 결정입니다.

  

우리가 용서했을지라도 그런 사람을 다시 대할 경우에는 지혜와 분별력이 필요합니다.

어떤 경우 잘못된 기준을 주장하거나 불필요한 의무감을 떠안아 본인도 상처받고 상대로 하여금

또 다시 죄의식에 빠지도록 길을 열어주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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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인 싸움을 하고 있는가?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엡6:12)

 

어떤 씨름 해설가는 방송에서

‘씨름은 넘어지면 지는 겁니다’ 하고 말을 해서

웃음을 안긴 적이 있습니다.

 

넘어지면 지는 것,

사실 그대롭니다.

 

영적인 전투는 가만히 있는 사단에게 다가가서

‘예수 이름으로 물러가라’ 고함을 치는 게 아닙니다.

언제나 맞붙어 씨름을 하는 중입니다.

 

하나님이 없는 사회적 합의에서 오는 악한 시스템에 의한 중압감,

정치나 경제, 사회 속에서의 은근한 압력에 의해

세상 질서에 줄서기를 해야 하는 일등이 되고 살아남습니다.

 

거기다가 마귀 사단은

우리의 구원받은 영적인 상태를 수시로 무너뜨립니다.

 

만약 이와 같은 영적인 싸움에 신음하고 있지 않다면

아마도 이런 사람들이 아닐까요?

 

그리스도 안과 밖이 애매모호한 사람,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의 양쪽이 구분이 안된 사람,

자신이 하늘에 속한 자로 거기에 앉아있음을 모르는 사람.

 

거기다가 진리의 성령의 인도를 받지 못해

광야 속에서의 이스라엘이 구름기둥과 불기둥 가운데 보호를 받았듯

하나님의 표적과 그 은혜 안에 옹알이를 하고 있는 초보적 신앙.

 

이를테면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면 무엇이든 다 할 수 있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어떤 악령으로부터 지켜주신다’라고 생각하며

미성숙하고 무지한 신앙의 낙관주의에 머물고 있는 사람일 것입니다.

 

하룻강아지가 범을 무서워하지 않는 것은

범에게 물려 죽어본 적이 없어서 일 것입니다.

 

영과 육, 빛과 어둠, 생명과 사망, 하늘과 땅,

영의 생각과 사망의 생각, 사랑과 미움 등의 대치상황이

자신 안에서 치열하게 전개된다는 사실을 모른다면

예수를 믿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만 할 뿐,

주 예수 그리스도를 좇아 의와 생명의 땅으로

그리고 하늘에 앉히신 그 자리로 침노하는

영적인 작업을 하고 있지 않다는 증거입니다.

 

마음이 컬컬할 때에만 "주여, 주여" 외쳐대거나

예수 이름으로 물러가라는 고함이나 치는 등의

과정도 진로도 향방도 없는 광야의 신앙일 뿐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따라

십자가를 건너 진리의 성령을 좇아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가고 있는 사람은

영적인 전투가 얼마나 치열한지를 잘 압니다.

 

우리는 혈과 육과 상대하는 싸움이 아니라

배후에서 역사하는 악한 영들과 세상 어둠의

시스템과 가치와 사상과 24시간 선한 싸움을 벌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얻은 자로

그리스도의 영을 모시고 비록 몸은 죽은 자이나

영은 산 자로 하나님의 영광에 나아가는 자격지심을

언제 어디서나 확립하는 것이 중요합니다(롬8:1-11).

 

거기서 영의 생각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귀에게 절대 육체라는 먹이를 주지 않아야겠기에

자신을 부인하고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것이 유일한 승리의 길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하나님 아버지를 앙망하는 것입니다.

 

거기서 하나님의 전신갑주로 무장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엡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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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성(罪性)이 자신을 지배하지 않도록 조심하라!

교회에 오면 우리가 죄인이라는 말을 듣게 된다. 그러나 교회에서 듣는 죄인은 세상의 죄인과 달리 종교적인 수사로 들리기에 오래 듣다보면 매너리즘에 빠지기 십상이다.

 

물론 세상에서 말하는 죄인과 기독교의 죄인은 차이가 있다. 세상에서 말하는 죄는 현행법을 위반하여 법적인 처벌을 받은 사람을 말한다. 대부분 교도소에 수감되어 죗값을 치루는 사람들이다.

 

그렇지만 교회에서 말하는 죄인은 형사적 혹은 민사적인 법을 위반하는 사람들과는 달리, 태어날 때부터 죄인으로 출생하였기에 누구나 예외없이 죄인의 신분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그런지 교회에서 듣게 되는 죄인에 대해 죄책감을 갖는 이도 별로 없고 심각하게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세상의 죄인과 기독교의 죄인은 죄의 성질 자체도 다르고 치러야 할 죗값도 비교할 수 없이 크다. 세상 죄인은 법원에서 판사가 선고한 형벌을 이행하면 죄에 대한 책임은 소멸된다. 전과기록이 남아있기는 하지만 다시 죄를 짓지 않는다면 문제될 게 없다.

 

그렇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죄는 세상에서 말하는 죄와 다르다. 즉 우리의 조상이 범죄한 이후에 운명적으로 죄가 우리의 몸에 들어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민사 혹은 형사적인 죄를 짓지 않더라도 죄의 대가를 치러야 한다.

 

그 죄의 대가는 사망이며 이 땅에 사는 동안에서 불행한 삶의 빌미를 제공한다. 이러한 내용은 교회의 교육이나 설교에서 자주 들어왔던 말이다.

 

그런데 우리는 죄가 우리의 생명과 영혼 또한 평안한 삶에 차지하는 비중에 대해 소홀히 생각하는 경향이 적지 않다. 감기 증상이 있는데 이를 소홀히 하다가 폐렴까지 악화되어 생명이 위독한 상황에 이르는 것과 같다.

 

죄성을 소홀히 여긴다면 고단하고 불행한 인생을 살다 영원한 지옥의 불못에 떨어지게 되어있다. 사람에게 죄가 없던 상태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지만 죄가 들어온 상태의 정반대라고 보면 아는 게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아담의 범죄 이후 죄가 세상에 들어찬 이후에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기고 오직 멸망받은 운명의 주인공이 되었다.

 

성경에서 말하는 죄인의 특징은 탐욕과 방탕, 분열, 술취함, 싸움, 분노, 질투, 살인, 음란, 간음 등의 불의한 속성을 낱낱이 소개하고 있다. 이러한 속성은 인간인 이상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보혈의 희생으로 우리의 죗값을 치루고 용서하셨기에 더 이상 죄가 우리를 지배할 수 없다. 그렇지만 우리가 죽어 육체를 떠나기 전까지는 죄의 속성인 죄성이 저절로 사라지지 않는다.

 

그래서 성령님이 우리 안에 내주하셔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과 몸을 통치하시고 다스리셔서 죄가 우리를 지배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이것이 성령이 내주하는 기도가 절대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성령이 내주하기 전에는 죄가 지배하는 삶을 살 수밖에 없고, 성령이 내주하는 기도를 하고 난 후에도 이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기도와 말씀을 가까이 하는 영적인 습관을 들여야 한다.

 

많은 크리스천이 오랜 신앙의 연륜에서 부족한 성품이 거룩한 성품으로 변하지 않고 세속적인 삶의 방식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으로 변화하지 않는 이유가 여전히 죄가 지배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성령이 내주하시는 기도를 통해 성령이 죄성을 억제하고 힘을 쓰지 못한 상태가 되어서야 비로소 성품이 변화하고 살아가는 이유가 달라지는 것이다.

 

그래서 기도가 성령이 기뻐하는 생각과 육체가 추구하는 죄성의 싸움판이 되는 것이다. 성실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만 성령이 내주하는 기도가 없다면 여전히 죄가 지배하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삶은 허전하고 냉랭하며 기쁨과 평안이 없고 기도해도 응답이 없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교회에 오면 이를 감추고 기쁜 척 평안한 척, 속내를 숨기고 있겠지만 말이다.

 

성령이 함께하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유지하고 있는 이들이라도 언제 죄성이 틈을 타서 자신을 지배하게 될지 모른다. 그러므로 항상 조심하여야 하는 이유이다. 일상의 삶에서 기도를 쉬지 않아야 하며 늘 성령과 깊고 친밀한 교제를 놓지 말아야한다.

탐욕과 방탕에서 벗어나라.

탐욕과 방탕은 죄의 대표적인 속성이다. 그런데 이 같은 죄성이 왜 기도를 방해하는지 살펴보자. 탐욕은 대부분 돈과 연관지어있다. 부자가 되고 싶은 게 세상 사람들의 공통적인 소망이며 아무도 이를 거부하지 않는다. 그러나 부자는 대부분 탐욕적이어야 가능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부자가 되기 위해 많은 돈을 버는 데 인생의 대부분의 시간을 소비하고 있다. 아침 일찍 일어나 밤늦게 누우며 주말도 휴일도 없는 이들도 적지 않다. 그렇게 몸을 혹사하는 이유는 부자가 되고 싶지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은 돈을 버느라 기도할 시간을 내지 못한다. 설령 시간이 났더라도 몸이 피곤해 기도를 할 수 없는 상태이다. 많은 크리스천들이 바빠서 기도를 할 수 없다는 변명을 한다.

 

이의 속내는 돈을 버는 시간을 줄여가며 기도할 생각이 추호도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적지 않게 돈을 벌어두어 이미 평생 쓸 만한 재산을 가진 사람도 탐욕이 사라지기는커녕 더욱 많아진다.

 

성경은 이를 두고 돈을 사랑하는 사람은 돈으로 만족함이 없다고 잘라 말하고 있다. 결국 가난하면 돈을 버느라 기도를 하지 못하고 부자는 부자대로 더 큰 부를 쌓아두느라 기도할 시간이 없다.

 

결국 재산의 유무가 아니라 탐욕을 없애지 않는다면 기도할 생각도 없고 기도할 시간도 내지 못한다. 탐욕이 기도를 방해하는 걸림돌이다. 이를 제거하지 않는다면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기도를 할 수 없다. 돈과 하나님, 둘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는 예수님의 명령이 나온 까닭이다.

또 다른 죄의 속성은 방탕이다. 방탕은 쾌락을 추구하는 마음을 말한다. 가장 일반적인 쾌락의 수단이 술과 성적인 음란이다. 술을 마시면 기분이 좋아진다. 그러나 술은 뇌의 활동을 둔화시켜 쾌감을 얻기 때문에 기도와는 상극이다. 기도는 정신을 몰두해야 하는데 술을 마신다면 집중을 할 수 없다.

 

물론 약간 마신다면 큰 상관은 없겠지만 질제하지 못하는 알코올 의존증이나 중독에 가깝다면 기도를 할수 없다. 술이 아니라 다른 중독들도 쾌락을 추구하는 것이다.

 

게임이나 포르노, 주식 중독이 되었다면 자신의 생각을 지배하고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이미 그들의 노예가 되었다는 증거이다. 이런 사람들은 형식적인 기도는 할 수 있겠지만 깊이 몰입하는 기도를 절대 불가능하다.

 

음란물에 빠진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음란에 빠지면 생각을 지배하고 있기에 기도에 몰입할 수 없다. 그러나 그게 전부가 아니다. 음란은 간음죄를 짓게 한다. 죄를 지으면 죄책감에 시달리게 되고 악령의 공격의 대상이 된다. 기도는커녕 신앙생활을 포기하고 교회를 떠나는 이들이 부지기수이다.

 

탐욕과 방탕은 범죄의 빌미가 되어 악령의 포로가 되기 십상이기도하지만, 먼저 기도를 방해하는 걸림돌이다. 탐욕과 방탕에 사로잡혀 있는 이들은 성령과 내주하는 기도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감정을 격동시키지 않도록 주의하라.

기도는 정신노동이다. 그냥 기도가 아니라 성령이 내주하는 기도의 습관을 들이려면 온전히 기도에 몰입하여야 한다. 그렇다면 항상 평정심을 유지하는 게 아주 중요하다.

 

그러나 세상을 살다보면 마음을 격동시키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툭하면 화를 내거나 짜증을 달고 사는 사람들은 평안한 마음을 잃고 있다는 증거이다. 분노를 터뜨리면 다시 평정심을 되찾는 데는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린다.

 

일상생활을 하면 그 사건을 잊어버린 것 같아도 기도를 시작하면 그 당시로 돌아가 분노가 다시 마음을 사로잡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기도에 집중하기가 힘들다. 긍정적인 생각에 비해 부정적인 생각은 파괴력이 크며 후폭풍도 상당하다.

 

한번 화가 나서 싸움을 벌였다면 여러 날 기도가 안 되는 일이 부지기수이다. 여러 날 기도를 하지 못했다면 정상적인 기도모습으로 돌아가는 게 여간 힘들지 않다.

 

필자처럼 오랫동안 기도습관을 들인 사람조차도 이삼일 기도에 집중이 안 되면 슬럼프 조짐이 보인다. 성령이 내주하는 기도로서 평안함 삶을 유지하고 있다가, 기도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날이 길어지면 삶이 짜증이 나고 우울해지며 마음이 건조하고 냉랭해지기 일쑤이다. 그런 일을 겪고 나면 마음을 격동시키는 일이 얼마나 기도하는 데 악영향을 끼치는 지 깨닫게 된다.

아무리 조심했다고 하더라도 일단 화를 내는 사건이 생기면 적지 않은 시간 기도에 집중이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화를 내고 짜증을 부리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해야 한다.

 

특히 성마른 성품을 가지고 있다면 더욱 그러하다. 툭하면 분노를 폭발하는 사람들은 사탄의 조종을 받기 쉽다. 화낼 일이 생기면 참아야 하며, 견디기 어렵다면 자리를 피하면서 극단적인 상황을 만들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즉각 마음속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의지하는 기도를 반복하는 기도를 하는 게 효과가 좋다. 화를 내고 분노를 폭발하는 것은 내 안에 있는 죄성이 드러나는 것으로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씻기 위해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의 능력으로 죄성이 자신을 지배하는 것을 방지하게 한다.

 

순간적으로 분노를 폭발하다보면 사탄의 공격을 받아 큰 싸움이나 범죄를 저지르기 쉬운데, 사탄의 공격을 방지하는 데는 십자가의 보혈을 의지하는 기도를 따라갈 게 없다.

 

사탄은 화를 자주 내는 사람들의 주변을 배회하면서 순간적으로 생각의 틈을 타서 들어가 조종하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분노의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고 살인을 저지르는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나중에 평상심으로 돌아가고 나서 후회하기 일쑤이다.

 

그러나 한번 저지른 과오에 대해서는 값비싼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수많은 부부가 이혼을 하는 경우도 그렇다. 싸우다 보면 감정이 격해져서 넘지 말아야하는 선을 넘어 폭력을 휘두르다 갈라서게 된다.

 

어쨌든 욱하는 감정을 절제하지 못하면 기도습관을 들이 수 없다. 화가 나는 일이 생기면 상대방의 처지를 이해하려고 애쓰고, 그도 안 되면 자리를 피하고 마음속으로 성령의 도움을 요청하라. 그게 최선의 방책이다.

의심, 걱정, 염려, 두려움은 기도의 적이다.

분노와 짜증 같은 격정적인 마음의 상태는 시간이 지나가면 곧장 수그러들지만 의심, 걱정, 염려, 두려움 같은 부정적인 마음의 상태는 시간이 지날수록 걷잡을 수 없이 빠져드는 경향이 있어 더욱 위험한 감정이다.

 

부정적인 생각이 마음에 자리잡고 있으면 더욱 증폭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시간이 갈수록 심각해진다. 우울증이 그래서 생겨난다. 처음에는 단지 부정적인 생각뿐이었지만 그것을 방치하면서 생각을 지배하게 되어 뿌리 깊은 우울증으로 굳어진 것이다.

 

우울증이 생겼다면 불면증, 자살충동까지 동반하는 게 일반적인 현상으로 아주 위험한 상태이다. 아시다시피 부정적인 생각은 기도를 방해하는 적이다. 의심이 든다면 믿음이 흔들리게 되고, 걱정과 염려, 두려움이 있다고 해도 믿음을 갉아먹게 된다.

 

이러한 부정적인 생각은 파괴력이 매우 커서 그냥 방치해 놓으면 거대한 괴물로 자라서 자신을 조종하고 지배하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을 살다보면 좋은 보다는 나쁜 일이 더 많고, 희망적인 일보다는 부정적이고 절망적인 일이 더 많은 게 현실 아닌가? 그렇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그리 희망적으로 보이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에 불과하다. 하나님을 믿는 자녀라면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철썩 같이 붙들고 살아가야 한다. 그 견고한 믿음의 원천이 바로 기도와 말씀에 있으며, 기도를 포기하지 않는 한 희망이 남아 있다.

 

그러나 기도를 하지 못하고 있다면 희망도 사라지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기도를 방해하고 포기하게 하는 의심이나 염려, 걱정, 두려움과 같은 부정적인 생각이 들기가 무섭게 즉각 성령의 도우심을 요청하며 생각 속에서 뽑아버려야 한다.

 

그러나 이런 부정적인 생각은 수시로 들어오기에 늘 경계하고 조심하고 있더라도 어느새 마음속에 잠입하곤 한다. 기도란 이런 부정적인 감정이 마음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싸움의 연속인 것이다.

 

그래서 단내 나는 기도훈련이 필요하고 적지 않은 기간이 소요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네 교회는 여러 기도회에 참석만을 요청하지, 정작 본질적인 기도훈련에 대해 무지한 것도 사실이다.

 

교회의 관행에 상관없이 성경에 기록된 기도방식을 몸에 익혀야 능력이 나타나고 열매가 있다. 쉬지 않고 기도하며, 기도할 때마다 간절히 기도하는 영적 습관을 몸에 배야 한다. 그 길만이 기도를 방해하는 온갖 적들과 싸워 능히 이길 수 있는 능력이다.

시간을 빼앗는 것들을 정리하라.

필자는 한 때 낚시에 많은 시간을 보냈던 적이 있었다. 사업에 실패하고 신앙도 시들해지고 나니 할 수 있는 일들이 많지 않았다. 그래서 도시 근교의 하천이나 저수지를 찾아가 시간을 때우곤 했다.

 

그러나 사역을 시작하고 나서는 낚시취미가 독이 되었다. 낚시는 많은 시간을 투입하는 일이다. 그래서 시간을 많고 할일이 없는 사람들이 낚시터에 즐비하다. 더구나 물고기는 야행성이라 낚시꾼들은 대부분 밤낚시를 선호한다.

 

그렇지만 낚시하느라 밤을 꼬박 새우고 나면 그 다음날은 시체놀이를 해야 한다. 낚시는 생각보다 정신을 몰입해야 하는 일이라 에너지를 많이 소비하기 때문에 낚시를 한 다음 날은 무척 피곤하다. 낚시꾼들이 기도에 몰입하는 일이란 어렵다. 둘 중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

 

시간을 보내는 일은 컴퓨터 게임도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것이다. 컴퓨터 게임은 장소와 시간이 제약이 많은 낚시와 달리 언제 어디서나 쉽게 할 수 있다. 가정마다 PC가 있고 시내에는 PC방이 널려있다.

 

그러나 모든 오락의 속성이 그렇듯 일단 시작하고 나면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르게 된다. 등산이나 골프 등도 적절히 하면 큰 무리가 없지만 과도하게 몰두하다보면 많은 시간을 빼앗기에 된다. 기도의 사람이 되려면 시간을 빼앗는 일들을 과감하게 정리해야 한다. 

그러나 오랫동안 이런 취미로 인생의 즐거움을 누리고 있던 사람들이 기도를 한다고 무 자르듯 과감하게 포기할 사람은 거의 없다. 기도의 기쁨과 즐거움을 알아갈 때까지는 많은 시행착오를 거치게 된다.

 

그러나 미리 걱정할 필요는 없다. 성령이 내주하시는 기도를 할 때까지가 어렵지, 성령이 내주하는 기도를 하고 나면 세상이 주던 즐거움은 하찮게 여기게 된다.

 

필자도 즐겨했던 낚시가 기도에 방해된다고 느껴지기 시작한 이후에는 거짓말처럼 낚시를 끊었다. 필자의 아내가 가끔 신기하다고 물어볼 정도이다. 그러나 생각만큼 고민했던 것은 아니다.

 

기도하는 즐거움이 낚시하는 기쁨보다 더 우월하다고 생각되면 자연스레 정리하게 된다. 성령이 내주하는 기도를 하는 이들은 세상이 주는 즐거움에 대해 관심이 별로 없다.

 

그런 기도에 무지했을 때에는 교회에 다녀도 세상 사람들과 진배없이 세상이 주는 즐거움에 탐닉하곤 한다. 그러나 기도를 시작하면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과 평안함이 얼마나 귀한 일인지 알게 되는 알이 온다. 고민과 고통 속에서 강철 같은 의지를 앞세우지 않더라도 자연스레 하나님과 동행하는 시간이 즐거운 날이 온다.


[스크렙한글]

 
출처 : 우자매샬롬하우스
글쓴이 : 시온의 영광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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